– 카렌 암스트롱의 『신의 전쟁』을 중심으로
21세기 현대 사회는 민주주의라는 정치 체제를 기본 전제로 운영되고 있다. 하지만 세계 곳곳에서는 여전히 신정 정치(Theocracy), 즉 종교 지도자나 종교 법이 지배하는 정치 체제가 존재한다. 대표적으로 이란, 사우디아라비아, 바티칸 시국 등이 있으며, 일부 국가는 세속적 정치 체제를 채택하면서도 종교의 영향력 아래에서 정치가 이루어진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중요한 질문 하나를 던지게 된다.
"신정 정치와 민주주의는 공존할 수 있는가?"
카렌 암스트롱(Karen Armstrong)의 저서 『신의 전쟁(Fields of Blood)』은 이 질문에 대해 깊이 있는 시사점을 제공한다. 암스트롱은 역사 속에서 종교와 정치가 어떻게 분리되거나 결합되었는지, 그리고 현대 정치에서 종교가 어떤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지를 면밀히 분석한다.
본 글에서는 신정 정치의 정의와 역사, 민주주의와의 본질적 차이, 그리고 두 체제 간의 긴장과 조화 가능성에 대해 카렌 암스트롱의 관점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1. 신정 정치란 무엇인가? – 신의 이름으로 통치되는 정치 체제
신정 정치(Theocracy)는 문자 그대로 ‘신이 통치하는 정치’를 의미한다. 하지만 현실에서 신이 직접 통치할 수 없기에, 이는 대개 성직자 혹은 종교 지도자들이 신의 뜻을 대리하여 국가를 통치하는 체제를 의미한다.
- 대표적인 신정 정치 국가들:
- 이란: 이슬람 율법(샤리아)을 바탕으로, 최고 종교지도자인 ‘아야톨라’가 정치적 권한을 행사한다.
- 바티칸 시국: 교황이 국가수반이며, 가톨릭 교리와 교회법이 모든 정치 결정의 기준이다.
- 사우디아라비아: 국왕이 존재하지만, 이슬람 율법이 실질적인 헌법 역할을 하며 종교법원이 사법권을 가진다.
카렌 암스트롱은 고대 사회 대부분이 신정 정치를 기반으로 발전해 왔으며, 종교와 정치가 분리된 현대적 국가 개념은 비교적 최근에 등장한 것이라고 강조한다.
그녀에 따르면, 종교는 오랫동안 국가 권력의 정당성을 부여하고, 질서를 유지하는 역할을 해왔으며, 그 자체로 인간 사회의 통합 도구였다.
즉, 신정 정치는 역사적으로 보편적인 정치 형태였으며, 종교와 정치의 결합은 오래된 전통 속에 뿌리내리고 있다.
2.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 다수의 의지 vs. 신의 뜻
민주주의는 주권이 국민에게 있고, 다수결을 통해 정치적 결정을 내리는 정치 체제이다. 대표적인 특징은 다음과 같다.
- 시민의 자유와 평등 보장
- 법의 지배(rule of law)
- 종교와 정치의 분리(세속주의, secularism)
- 표현의 자유, 언론의 자유, 종교의 자유 보장
암스트롱은 『신의 전쟁』에서 민주주의의 핵심은 "정치 권위가 인간 사회 내부에서 발생하며, 신의 뜻이 아니라 국민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러한 민주주의 체제는 본질적으로 신정 정치와 충돌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민주주의는 개인의 자유와 다양성을 존중하지만, 신정 정치는 종교적 진리를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기 때문에 이견이나 이단을 허용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따라서 민주주의와 신정 정치는 기본적인 정치 철학에서 서로 다른 출발점을 가지고 있다.
3. 신정 정치와 민주주의의 충돌: 역사와 현실에서의 갈등
① 이란 혁명 이후의 변화
1979년 이란 이슬람 혁명 이후, 팔라비 왕조의 세속 국가 체제는 이슬람 율법과 종교 지도자의 통치를 중심으로 한 신정 정치로 대체되었다.
- 이란 헌법은 최고지도자(아야톨라)가 입법, 행정, 사법의 모든 결정에 개입할 수 있도록 한다.
- 그 결과, 국민들이 선거를 통해 대통령과 의회를 뽑지만, 실제 권력은 종교 지도자에게 집중되어 있다.
암스트롱은 이란 사례를 통해 신정 정치가 민주주의의 형태를 일부 도입할 수는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대중의 뜻보다 종교 해석이 우선된다는 점에서 근본적 제약이 있다고 지적한다.
② 종교 극단주의와 정치 참여의 모순
근대 이후 종교적 가치에 기반한 정당들이 등장하면서, 종교가 민주주의 안으로 들어오기도 했다.
예: 이슬람 형제단, 힌두 민족주의 정당, 기독교 민주당 등
하지만 이러한 정당들이 선거라는 민주주의의 틀 안에서 권력을 잡은 후, 민주주의 자체를 제한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기도 했다.
- 이는 ‘민주주의를 통해 비민주주의를 실현하려는 경향’으로, 암스트롱은 이를 "종교의 정치화가 가져올 수 있는 위험성"으로 경고한다.
신정 정치는 종교의 절대 진리를 우선시하기 때문에, 시민의 다원성과 비판적 사고를 제약하는 경향이 있다.
4. 공존의 가능성은 있는가? – 암스트롱의 제언과 현대적 시사점
카렌 암스트롱은 『신의 전쟁』에서 다음과 같은 균형점을 제시한다.
① 종교와 정치의 ‘완전한 분리’는 불가능하다
- 암스트롱은 "종교는 인간의 정체성과 도덕성을 형성하는 요소이기 때문에, 정치와 완전히 분리될 수 없다"라고 말한다.
- 실제로 많은 민주주의 국가들도 정책과 법률 제정에 있어 종교적 가치의 영향을 받는다.
- 예: 미국에서 낙태 문제, 동성결혼 논의 등은 종교적 논의와 깊이 연관됨.
② 그러나 종교가 국가 권력을 독점해서는 안 된다
- 신정 정치는 종교 해석자들이 절대적 권력을 행사하는 체제로, 종교의 다양성과 시민의 자유를 억압할 가능성이 크다.
- 암스트롱은 "종교는 공공 윤리를 제공하는 데 참여할 수 있지만, 정치 권력의 중심이 되어선 안 된다"라고 주장한다.
③ ‘종교의 공공적 역할’은 가능하다
- 종교는 도덕적 토대와 공동체 연대감을 강화하는 데 기여할 수 있으며, 사회 정의와 인권 보호에 중요한 목소리를 낼 수 있다.
-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종교와 정치가 상호 감시와 균형을 이루는 관계로 공존할 수 있다.
결국 공존의 핵심은 ‘권력의 분리’와 ‘상호 존중’이다.
5. 결론: 신정 정치와 민주주의는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가?
✔ 신정 정치는 역사적으로 보편적인 통치 형태였지만, 현대 민주주의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가치 체계를 가진다.
✔ 종교가 국가 권력을 지배할 때, 시민의 자유와 다원주의는 위협받을 수 있다.
✔ 그러나 종교가 민주주의 내부에서 공공 윤리와 도덕적 기준을 제시하는 역할을 하는 것은 긍정적으로 평가될 수 있다.
✔ 카렌 암스트롱은 종교와 정치가 완전히 단절될 수는 없지만, 권력의 독점이 아닌 균형과 협력의 원칙 아래에서만 공존이 가능하다고 강조한다.
‘신의 이름으로 통치할 것인가, 국민의 이름으로 통치할 것인가’라는 질문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신의 전쟁』은 이 질문에 대한 성찰을 우리에게 요구하며, 종교와 정치의 건강한 경계에 대해 깊은 통찰을 제공한다.